2009년 02월 19일
노동자, 노조, 그리고 파업.
"자본이 싫으면 북한으로 가라, 당신들은 국가를 해롭게 하는 이적단체."
노동자란 사전적 의미로 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노동하는 사람은 전부 노동자인가?
우리 사는 세상에서는 엄밀히 말하자면 노동자가 위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득세하는 이 사회에서 노동자의 의미는 노동을 파는 사람.
즉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장같은건(응?) 노동자로 안쳐준다는 얘기다.
그리고 한국사회같은 계급개념이 흐릿한 나라에서는
사무직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일단은 위 일련의 필터를 거친 마지막 단계의 노동자,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노동자라고 불리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들은 주로 몸으로 일하고 상대적으로 사무직 노동자들에 비해
좀더 낮은 학력을 가졌고 좀더 많은 사람이 좀더 조직적으로 일한다.
바로 이 차이점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을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 보다 빨리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노조이다. 조직적으로 일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모였을 때
개개의 힘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당연명제를 몸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왜 노조가 생겼을까? 왜 노동자들에게 강한 힘이 필요하게 된 것일까?
그것의 이유는 자본가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자본이라는 생산수단을 소지하였기에 항상 기득권을 가진 쪽인 자본가는
이윤을 추구한다는 생태적인 원리를 다할 때 노동자를 쥐어짤 수밖에 없다.
자본을 돌려 이윤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한 노동의 결과물인 생산품의 가치보다
항상 임금이 적게 들어야만 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당연히 자본가는 어떤 식으로든 임금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노동자는 어떻게든 임금을 늘리도록 노력한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당연한 일이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 노동자들을 압박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그 같은 공격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을까.
개개인으로는 회사를 옮기거나 하는 방식의 저항이 있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큰 틀에서 볼 때 처우가 개선되는 방식이 아니었고
노동자들이 더이상 견디기 힘들었을 때 그들은 마침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이 노동조합이 생긴 이유였다.
자본가들은 그 사회의 기득권층이었고 그 사회의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본계급에 속하거나 그들에게 편향되어 있었고 현실 또한 그렇다.
인용문에서 스미스가 말한 진리를 노동자들은 핍박받은 경험을 통해 알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처우개선을 위해서 법이 해주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그들은 회사만이 아니라 사회와도 싸워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단결했고
단결된 노동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권익은 옛 시절에 비해서 좋아졌다.
근대에 하루 18시간 일하는게 당연했던 노동자들이
지금은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면 고생한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을까?
기득권들이 늘 말하는 국가가 잘되면 국민도 잘산다.
또는 그것의 작은 판인 회사가 잘되야 노동자가 잘산다.
이런 "원리"의 결과일까?
답은 아니다.
노동자의 권리는 그들의 힘겨운 투쟁으로부터 나왔다.
처음에는 서민의 대표가 법을 만들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해서
부르주아시민들만 가지고 있던 투표권을 가지기 위해 투쟁했고
투표권이 그들의 처우를 바꾸지 못했기에 다음에는 직접적으로 처우개선을 위해 투쟁했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 노동자들은 현재의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단체투쟁 즉 노동조합의 파업에 의해서만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노조에 대한 인식이 안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추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가에게 유효한 노동자의 무기는 단결이고 그것의 상징적인 단체가 노동조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이미지를 악화시켜야 했다.
이 시도는 주로 경제학이라는 과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와 같이 임금기금설을 제시하였고
이것은 노동조합의 요구에 대한 제조업자들과 경제학자들의 상투적인 방패로 사용되었다.
노동자들은 임금이 투쟁을 통해서만 올라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의 이 설명을 싫어했다.
JT 밀은 1869년 이 이론을 철회한다고 공표하면서 노동조합의 활동이 없었다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이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용감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학설은 많은 노동자를 공격하는 구실이 되었다.
이것은 비단 당시의 일만이 아니다.
현재의 경제학도 많은 부분에서 노동자를 공격하고 자본가의 운신의 폭을 넓이는 데 사용되었고,
이외에도 언론( 광고를 통해 수익을 얻는 언론은 자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에 의한 공세,
후원금을 보내는 정치가들에 의한 국가적인 공세, 등등
여러 가지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거나 동결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책략이 계속 되어 왔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어쩔 수 없다"를 듣고 있는가.
과연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과연 스스로의 돈놀이로 망하는 자본가를 세금으로 살리는게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들"이 진리라고 말했던 신자유주의가 처참하게 몰락하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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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링크 복구용
노동자란 사전적 의미로 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노동하는 사람은 전부 노동자인가?
우리 사는 세상에서는 엄밀히 말하자면 노동자가 위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득세하는 이 사회에서 노동자의 의미는 노동을 파는 사람.
즉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장같은건(응?) 노동자로 안쳐준다는 얘기다.
그리고 한국사회같은 계급개념이 흐릿한 나라에서는
사무직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일단은 위 일련의 필터를 거친 마지막 단계의 노동자,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노동자라고 불리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들은 주로 몸으로 일하고 상대적으로 사무직 노동자들에 비해
좀더 낮은 학력을 가졌고 좀더 많은 사람이 좀더 조직적으로 일한다.
바로 이 차이점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을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 보다 빨리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노조이다. 조직적으로 일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모였을 때
개개의 힘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당연명제를 몸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왜 노조가 생겼을까? 왜 노동자들에게 강한 힘이 필요하게 된 것일까?
그것의 이유는 자본가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자본이라는 생산수단을 소지하였기에 항상 기득권을 가진 쪽인 자본가는
이윤을 추구한다는 생태적인 원리를 다할 때 노동자를 쥐어짤 수밖에 없다.
자본을 돌려 이윤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한 노동의 결과물인 생산품의 가치보다
항상 임금이 적게 들어야만 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당연히 자본가는 어떤 식으로든 임금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노동자는 어떻게든 임금을 늘리도록 노력한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당연한 일이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 노동자들을 압박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그 같은 공격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을까.
개개인으로는 회사를 옮기거나 하는 방식의 저항이 있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큰 틀에서 볼 때 처우가 개선되는 방식이 아니었고
노동자들이 더이상 견디기 힘들었을 때 그들은 마침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이 노동조합이 생긴 이유였다.
자본가들은 그 사회의 기득권층이었고 그 사회의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본계급에 속하거나 그들에게 편향되어 있었고 현실 또한 그렇다.
"의회가 노동자 계급에게 많은 것을 양보한 것도 아니지만, 판사들이 사용자가 혐오하는 법률을 실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양보조차 전혀 쓸모가 없었다. (중략).... 대체로 판사들은 고용주가 법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다면, 복종을 강제할 방도는 없음을 당연시한 듯하다. (중략)... 그들은 고용주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용주들이 법을 지키게 하려고 애쓰지 않고 노동자들을 감옥에 보냈다.
애덤 스미스는 이것이 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우연한 일이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이라고 믿었다. 자신들의 영웅인 스미스가 자신들의 행위에 찬성해주리라고 기대한 사용자들은 <국부론>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애써 무시했다.
"시민 정부는 그것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인 한 실제로는 가난한 자들에게서 부자를,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 자본주의의 역사 바로알기 p236~237 )
애덤 스미스는 이것이 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우연한 일이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이라고 믿었다. 자신들의 영웅인 스미스가 자신들의 행위에 찬성해주리라고 기대한 사용자들은 <국부론>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애써 무시했다.
"시민 정부는 그것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인 한 실제로는 가난한 자들에게서 부자를,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 자본주의의 역사 바로알기 p236~237 )
인용문에서 스미스가 말한 진리를 노동자들은 핍박받은 경험을 통해 알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처우개선을 위해서 법이 해주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그들은 회사만이 아니라 사회와도 싸워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단결했고
단결된 노동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권익은 옛 시절에 비해서 좋아졌다.
근대에 하루 18시간 일하는게 당연했던 노동자들이
지금은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면 고생한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을까?
기득권들이 늘 말하는 국가가 잘되면 국민도 잘산다.
또는 그것의 작은 판인 회사가 잘되야 노동자가 잘산다.
이런 "원리"의 결과일까?
답은 아니다.
노동자의 권리는 그들의 힘겨운 투쟁으로부터 나왔다.
처음에는 서민의 대표가 법을 만들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해서
부르주아시민들만 가지고 있던 투표권을 가지기 위해 투쟁했고
투표권이 그들의 처우를 바꾸지 못했기에 다음에는 직접적으로 처우개선을 위해 투쟁했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 노동자들은 현재의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단체투쟁 즉 노동조합의 파업에 의해서만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서나 보통의 노동 임금은 흔히 이해관계가 결코 같지 않은 두 당사자들 사이에 맺는 계약으로 결정된다. 노동자들은 되도록 많이 받으려고 하며, 고용주들은 되도록 적게 주려고 한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인상하기 위해 단결하는 경향이 있고, 사용자들은 임금을 인하하기 위해 단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통례로 볼 때 이 분쟁에서 두 당사자 중에 누가 유리한지를 예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중략).. 고용주들은 수가 적기 때문에 훨씬 쉽게 단결할 수 있다. 게다가 법은 고용주의 결사는 승인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금지하지는 않지만, 노동자들의 결사는 금지한다. 임금을 인하하기 위한 결사를 방해하는 의회 법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상하기 위한 결사를 방해하는 법은 많다." - 애덤 스미스, 1776
그러나 통례로 볼 때 이 분쟁에서 두 당사자 중에 누가 유리한지를 예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중략).. 고용주들은 수가 적기 때문에 훨씬 쉽게 단결할 수 있다. 게다가 법은 고용주의 결사는 승인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금지하지는 않지만, 노동자들의 결사는 금지한다. 임금을 인하하기 위한 결사를 방해하는 의회 법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상하기 위한 결사를 방해하는 법은 많다." - 애덤 스미스, 1776
이쯤 되면 노조에 대한 인식이 안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추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가에게 유효한 노동자의 무기는 단결이고 그것의 상징적인 단체가 노동조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이미지를 악화시켜야 했다.
이 시도는 주로 경제학이라는 과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임금은 자본과 인구의 상대적인 양에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경쟁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임금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임금은 ... 노동자의 고용에 사용되는 기금의 총액이 증가하거나 취업 경쟁자 수가 감소할 때만 오를 수 있다. 또한 임금은, 임금을 지급하는 데 바쳐지는 기금이 감소하거나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수가 증가할 때를 빼면 결코 하락하지도 않는다." - 존 스튜어트 밀, 1848
존 스튜어트 밀은 이와 같이 임금기금설을 제시하였고
이것은 노동조합의 요구에 대한 제조업자들과 경제학자들의 상투적인 방패로 사용되었다.
노동자들은 임금이 투쟁을 통해서만 올라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의 이 설명을 싫어했다.
JT 밀은 1869년 이 이론을 철회한다고 공표하면서 노동조합의 활동이 없었다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이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용감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학설은 많은 노동자를 공격하는 구실이 되었다.
이것은 비단 당시의 일만이 아니다.
현재의 경제학도 많은 부분에서 노동자를 공격하고 자본가의 운신의 폭을 넓이는 데 사용되었고,
이외에도 언론( 광고를 통해 수익을 얻는 언론은 자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에 의한 공세,
후원금을 보내는 정치가들에 의한 국가적인 공세, 등등
여러 가지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거나 동결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책략이 계속 되어 왔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어쩔 수 없다"를 듣고 있는가.
과연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과연 스스로의 돈놀이로 망하는 자본가를 세금으로 살리는게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들"이 진리라고 말했던 신자유주의가 처참하게 몰락하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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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링크 복구용
# by | 2009/02/19 17:51 |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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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도 있고 자본주의논리에 따라서 경제시스템도 돌아가고..
그냥 국가형태의 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라고 보는게 맞을 듯.
그래서 정말 노조때문에 기업이 망하나보다 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죠 ...
그렇지만 지금같은 위기시기에 노동자들에게 공격이 들어오는데
그때 어떻게 자신을 지키는가를 겪게 되면 노조에 대한 흑색선전에서 눈을 뜨게 되고
더불어 언론도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죠.
그런 노동자분들이 변혁을 일으킬 수도 있을테고 ;)
세계가 움직이는 시기이니 기대가 됩니다...ㅋ
정작 노력한 사람은 무시당하고 공은 그것을 막고 탄압한 사람이 가져간다는 느낌입니다.
이거 재주는 곰이 구르고 돈은 때놈이 챙긴다 이상이네요....
그래도 최근의 급진화를 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